구도희 자원순환팀 활동가 
heesayhi@kfem.or.kr
쓰레기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집에서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를 신나게 먹고 봉지를 버리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린다는 행위가 참 이상하다는 것을요. 이 과자 봉지를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나면, 채워진 쓰레기봉투를 다시 들고 집 앞 쓰레기 수거함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쓰레기는 버리는 게 아니라, 그저 한 자리에 잠시 머물다가, 이동하는 것일 뿐 아닐까요?

집 앞에 버려진 쓰레기봉투는 청소노동자들에 의해 하치장으로 옮겨지고, 하치장에서 분류되면 각각 재활용업체, 소각장, 매립장 등으로 이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계적 압축이나 파쇄, 또는 화학적 응집이나 고형화되기도 합니다. 쓰레기는 결국 영원히 이동하고, 영원히 변형될 뿐입니다. 소각 또는 매립된다고 하더라도, 그 처분의 속도는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쓰레기양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결국 최종처분이라고 불리는 처리 과정만 있을 뿐, 쓰레기 문제 그 자체에 있어서 '최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쓰레기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주 불편합니다. 그리고 이 불편한 사실은 쓰레기의 생산, 소비, 처리 과정이 전지구적인 문제라는 점과 결합하여, 실천과 행동에 대한 냉소를 낳기도 합니다. "어차피 다른 나라들은 분리수거도 안 하는데, 한국이 분리수거 열심히 한다고 해봤자 무슨 쓸모가 있어?"와 같은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저는 그러한 물음 앞에서, 불편함과 공존하기를 제안합니다.


불편함을 느낀다는 사실은 곧, 나 자신 또한 이 과도한 쓰레기 생태계에 어떤 식으로든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감각이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쓰레기를 줄여야겠다는 성찰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체성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쓰레기 없는 세상이란 기획은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는 낙관주의적 태도로도, 개인의 필요를 과도하게 억제하고 검열하는 방식으로도 이뤄질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면 그제야 나도 동참하겠다는 말, 즉 쓰레기 문제를 혁명적으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말 또한 그만큼 허구적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불편을 느끼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에 연결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무포장 비건 도넛 하나, 제로웨이스트 물건 하나를 사는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쓰레기 없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훈련해 보는 일인 동시에, 기후위기라는 이 총체적인 현상을 주체적 단위로 파악하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이런 실천으로부터 공통으로 마주한 위기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으며,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공통의 필요를 찾고, 그 필요를 확장시켜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쓰레기가 처리되는 과정에서 정의로운 방향으로 이동하게 하고,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통해 최대한의 쓰레기를 소중한 자원으로 활용하며, 기업과 사회제도가 구호뿐이 아닌 진정한 제로웨이스트로 가는 길은 이런 식으로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서울환경연합은 시민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활동가로서 펼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아주 생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라는 점이야말로, 활동을 지속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활동이 시민들과 이어져있다는 감각은 서울환경연합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입니다.

서로에게서 변화의 힘을 발견하는 순간을 쌓아나가는 작업에 함께해주세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울환경연합과 함께해주세요!


구도희 자원순환팀 활동가 
heesayhi@kfem.or.kr
쓰레기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집에서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를 신나게 먹고 봉지를 버리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린다는 행위가 참 이상하다는 것을요. 이 과자 봉지를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나면, 채워진 쓰레기봉투를 다시 들고 집 앞 쓰레기 수거함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쓰레기는 버리는 게 아니라, 그저 한 자리에 잠시 머물다가, 이동하는 것일 뿐 아닐까요?

집 앞에 버려진 쓰레기봉투는 청소노동자들에 의해 하치장으로 옮겨지고, 하치장에서 분류되면 각각 재활용업체, 소각장, 매립장 등으로 이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계적 압축이나 파쇄, 또는 화학적 응집이나 고형화되기도 합니다. 쓰레기는 결국 영원히 이동하고, 영원히 변형될 뿐입니다. 소각 또는 매립된다고 하더라도, 그 처분의 속도는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쓰레기양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결국 최종처분이라고 불리는 처리 과정만 있을 뿐, 쓰레기 문제 그 자체에 있어서 '최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쓰레기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주 불편합니다. 그리고 이 불편한 사실은 쓰레기의 생산, 소비, 처리 과정이 전지구적인 문제라는 점과 결합하여, 실천과 행동에 대한 냉소를 낳기도 합니다. "어차피 다른 나라들은 분리수거도 안 하는데, 한국이 분리수거 열심히 한다고 해봤자 무슨 쓸모가 있어?"와 같은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저는 그러한 물음 앞에서, 불편함과 공존하기를 제안합니다.


불편함을 느낀다는 사실은 곧, 나 자신 또한 이 과도한 쓰레기 생태계에 어떤 식으로든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감각이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쓰레기를 줄여야겠다는 성찰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체성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쓰레기 없는 세상이란 기획은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는 낙관주의적 태도로도, 개인의 필요를 과도하게 억제하고 검열하는 방식으로도 이뤄질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면 그제야 나도 동참하겠다는 말, 즉 쓰레기 문제를 혁명적으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말 또한 그만큼 허구적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불편을 느끼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에 연결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무포장 비건 도넛 하나, 제로웨이스트 물건 하나를 사는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쓰레기 없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훈련해 보는 일인 동시에, 기후위기라는 이 총체적인 현상을 주체적 단위로 파악하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이런 실천으로부터 공통으로 마주한 위기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으며,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공통의 필요를 찾고, 그 필요를 확장시켜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쓰레기가 처리되는 과정에서 정의로운 방향으로 이동하게 하고,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통해 최대한의 쓰레기를 소중한 자원으로 활용하며, 기업과 사회제도가 구호뿐이 아닌 진정한 제로웨이스트로 가는 길은 이런 식으로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서울환경연합은 시민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활동가로서 펼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아주 생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라는 점이야말로, 활동을 지속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활동이 시민들과 이어져있다는 감각은 서울환경연합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입니다.

서로에게서 변화의 힘을 발견하는 순간을 쌓아나가는 작업에 함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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